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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셚] 나의 항아에게. 02

효진/창윤 장편


나의 항아에게.

효진/창윤

W. 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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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며칠은 창윤과 효진 둘 다,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윤이 효진을 그리워했던 만큼 효진도 창윤을 보고 싶었을 터인데, 하루 아침에 주종 관계가 되어 버린 어색함이 더 컸던 것이다. 무엇보다 제일 큰 문제는 창윤의 말투였다. 다른 궁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명령조 어투가, 효진에게는 도무지 할 수 없던 것이다.


“저하.”

“어? 어... 왜?”

“편하게 하세요.”


효진은 늘 그랬듯 창윤을 배려했다. 친구였던 아이를 주인으로 모시고, 거기다 존댓말까지 하는 게 분명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창윤이 자신과 얘기하고 싶어서 답답해한다는 걸 알고서 먼저 굽혀 준 것이다. 창윤은 효진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와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아이라고.


“고마워.”




효진이 궁궐에 들어온 뒤로, 창윤의 외출은 잦아졌다. 기껏해야 궐내를 돌아다니는 것뿐이었지만 그걸로 좋았다. 공부와 회의를 제외하고는 항상 동궁전 안에만 있었던 세자가 궁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자 궁인들, 특히 궁녀들은 난리가 났다. 잘생긴 세자가 궁을 활보하고 다니는데, 심지어 그 옆을 보좌하는 호위무사까지 잘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창윤은 궁녀들에게 관심도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조금이라도 효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말을 섞지 못하더라도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았다. 동궁전 안까지 들어오는 건 호위무사라도 위급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나인들만 출입할 수 있었으니까.


“효진아.”

“네, 저하.”

“정원으로 산책 가자. 바람이 선선해서 딱 좋을 것 같아.”


창윤은 단독주택에 딸린 마당 정도의 작디작은 동궁전 정원을 참 잘도 돌아다녔다. 정원의 끝과 끝을 아무 생각 없이 왕복하면 길어야 오 분이 걸릴 정도로 작은데도 말이다. 그래도 창윤의 산책에는 나름대로의 패턴이 있었다.


토끼와 골든 리트리버에게 먹이 주기, 수국가 장미가 심어진 작은 정원에서 꽃잎 어루만지기, 정원 중간의 연못에서 거북이들에게 먹이 주기. 세 가지 일이 끝나면 정원 끝에 만들어진 조그마한 대숲에 다다른다. 그곳에 앉아 잠깐 쉬고,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느릿느릿 동궁전으로 돌아가면 창윤의 산책이 끝나는 것이다.


“효진아.”

“네, 저하.”


언젠가부터 익숙해진 ‘호위무사로서의’ 효진에게서 왠지 모를 괴리감이 느껴졌다. 평생 적응 못할 줄 알았는데, 이것도 익숙해지는구나... 창윤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격식 차리지 말고 내 이름 불러 줘. 창윤아, 이렇게.”

“그럴 수 없다는 건 저하께서 제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이었다. 효진에게서 괴리감이 느껴지는 이유였다. 예전과는 다른 위치, 다른 관계가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과 멀어지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애초부터 왕가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무도 없잖아.”

“안 됩니다.”

“명령이야.”


왜일까. 쓸데없는 고집이 피어났다. 둘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할 수도 있는 단어였기에, 창윤은 그동안 단 한 번도 ‘명령’을 내린 적은 없었다. 효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명할게, 효진아. 네 입술 틈새로 나오는 말이 내 이름이면 좋겠어.”


당황스러웠다. 무슨 생각으로 내뱉은 말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괜한 고집이었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미묘하게 몽글몽글한 느낌은 단순한 고집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그렇지만 불과 동궁전의 뒤쪽인걸요.”

“괜찮아.”

“정원 근처에 나인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수다스럽다는 걸 아시잖아요.”

“괜찮대도. 뭐가 그렇게 겁이 나는데?”

“불손한 소문이 퍼져, 저하께 폐를 끼치게 될 알 수 없는 미래가요.”


언제나처럼, 효진은 창윤을 배려한다는 이유였다. 언제나, 항상, 한결같이. 그래서인지 오기가 생겼다. 창윤은 어떻게든 효진에게 자신의 이름을 들어야만 했다. 왜인지 알고 있었다. 오기가 생긴 것이었다.


“내가 지켜 줄게. 권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라잖아.”

“문자라도 보내 드리겠습니다.”

“싫어. 네 목소리로 듣고 싶은 거야.”

“하지만,”

“효진아.”


오늘따라 완강하게 버티는 효진이 밉기만 했다. 이름 하나 불러 주는 게 뭐가 대수라고. 학생 때와 똑같았다. 창윤은 도저히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세자가 아니었다면, 왕자가 아니었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친구를 사귈 수 있었을 테고,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겠지.


“내가 왕가의 사람이 되고, 네가 궁의 사람이 되기 전, 우리는 뭐였어?”

“... 였습니다.”

“다시.”

“친구였습니다.”


그래, 우리는 친구 ‘였던’ 사이지. 창윤은 쌉싸래한 카카오를 씹고 있는 것만 같았다.


“친구 사이에 이름 불러 달라는 거, 너무 과한 부탁은 아니라고 생각해.”

“......”


효진은 자신이 불리할 때만 대답을 안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렇게 꼬박꼬박 저하라고 불렀으면서.


“내가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궁금하지.”

“아, 아니...”

“아무도 날 이름으로 불러 주질 않아. 궁인들 중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다른 친구들은 다 밖에 있잖아. 근데 너마저도 내 이름을 못 부른다 하니, 왕의 아들로 태어난 내가 원망스러워. 그래서 그래.”


처음 털어 놓았다. 단순히 오늘 갑자기 생긴 고집은 아니었다. 세자가 된 후로 ‘이 선’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 이름마저도 가족만이 부를 수 있었다. ‘이창윤’이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가족들에게조차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기분은 꽤나 우울했다. 그래서 효진에게 희망을 걸어 본 것이다. 그래도 효진이라면 불러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분위기에, 효진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입을 뗐다.


“저하,”

“됐어, 들어가자.”


오늘 산책의 날씨는 맑음, 분위기는 흐림이었다. 창윤은 정말로 우울증이 생겨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효진과 자신의 사이가 우중충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이니까.




+) 캬, 대단한 급전개의 느낌이 나죠? 맥락도 없이 쭉쭉 나가네요~ 그와 함께 제 인성도 멀리멀리...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현대에서의 궁중물(?)이다 보니까 옛날 "~하거라.", "~하소서." 이런 말투는 안 쓰려고 했어요. 보면서 좀 안 어울린다거나 의아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ㅠㅠ 이 글의 배경은 현대!! 이므로 스마트폰도 있구요, TV도 있구요... 네...

+) 창윤이와 효진이의 갈등이 정말 보기 좋아요... 창윤이가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너무 보기 좋아요... 사실 저는 자기만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인성은 개선하도록 노력하겠읍니다...

ONF RPS @Mali_22_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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