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효셚] 나의 항아에게. 03

효진/창윤 장편


나의 항아에게.

효진/창윤

W. 말리



***

"저하, 호위무사가 저하를 뵙길 청한답니다."


오전에 효진과 같이 산책한 이후로, 창윤은 자신이 너무 이기적으로 굴은 것은 아닌가 싶어서 하루 종일 종종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핑계를 대고 동궁전 안에 틀어박혀서, 혹시라도 효진의 기분이 상했을까 걱정뿐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창윤에게 가혹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효진의 생각을 겨우 정리하고 이제 막 책을 손을 잡았건만, 밖에서 들리는 나인의 목소리는 효진의 방문을 알렸다.


"호위무... 효진이가?"

"네. 너무 늦은 시각이니 물러가라 이를까요."

"아니, 안으로 들여도 괜찮아."


짙은 붉은색의 머리카락과 대조되는 연한 하늘색의 한복을 입고 세자의 방 안으로 발을 들인 효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정한 모습이었다. 효진은 항상 외부 일정이 있을 때는 검은 수트, 궁궐 안에서는 검은 호위복만을 입었다. 날마다 검은 옷의 반복이었던 패턴을 하늘색 한복이 처음으로 깨뜨린 것이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저하. 제가 잠시 머물러도 될지요."


창윤의 심정을 딱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랬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벙벙해진 창윤의 표정을 본 효진은 바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저하께 잠깐이라도 벗이 되고자 하여, 이렇게 늦은 시각에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 뵈었습니다."


아까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는 말 취소할래. 이건 또 무슨 소리인데! 한꺼번에 훅 들어온 효진의 말들 때문에 과부화가 걸린 창윤의 정신줄은 그만 가출을 해 버린 듯하였다. 여전히 멍한 얼굴로 앉아,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창윤에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효진은 딱 한 마디만 했다.


"창윤아."


창윤은 꼭 상상을 하다가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려 화들짝 깨는 사람마냥, 그제서야 두 눈에 생기를 담고 효진에게 반응했다.


"너, 너... 뭐라고, 어...?"
"이렇게 불러 주길 바란 거 맞지, 창윤아."


효진은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아직도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창윤에게 다가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앞에 앉고는,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창윤이 읽고 있던 책을 덮어 버렸다. 효진이 바로 앞에서 턱을 괴고 빤히 쳐다보는데도, 창윤은 낮에 그렇게 조르던 제 이름을 실제로 몇 개월 만에 들으니 새삼 벅차는지 눈가가 금방 그렁그렁해졌다. 살풋 웃고 있던 효진은 창윤의 눈에 눈물이 고이니 당황해서 직업병 말투가 튀어나왔다.


"저, 저하, 괜찮으세요...? 제가 갑자기 너무 무례했다거나, 혹 어디 불편하신 데나 아프신 데라도..."


순식간에 말투도 완벽하게 바뀌고, 안절부절인 상태로 자신을 건들지도 못하며 당황한 티를 팍팍 내는 효진이 너무 웃겨서 창윤은 그렇게 푸흡, 웃어 버리고 말았다. 눈가에 가득 고였던 눈물들은 창윤의 눈웃음 덕분에 그대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 진짜...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웃기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효진은 창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슬그머니 창윤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잠깐 넋이 나간 듯하더니, 금세 멋쩍게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행동했다.


"다, 당연하지~ 내가 그런 거에 쫄고 그러겠냐?"
"말은 더듬지 말고. 난 네가 쫄았다고 한 적 없는데, 왜 혼자 찔려?"
"... 넘어가, 그냥."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낮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 시시덕거리고 있으니, 창윤은 꼭 학창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좋았고, 행복했고, 이 시간이 계속되길 빌었다. 아니,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좋았다. 지금이 마지막으로 시간이 멈춘다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을 테니.


"나도."


뜬금없는 효진의 대답에 창윤은 표정에 물음표를 띄웠다. 갑자기?


"너 방금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한 거 아니야?"
"허얼! 역시 김효진, 짱이다."
"그래서 나도, 한 거야. 나도 지금이 너무 좋고, 소중하고 그렇거든. 우리가 예전으로 시간 여행 하는 것 같아서,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있는 게 신기해서."


효진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오글거리고 간질거리는 말이었지만, 좋았다. 이렇게 아무 말이 없어도 어색해지지 않는 게, 그저 효진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효진도 자신과 같이 느낄까, 걱정이 됐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정적인 시간, 정해져 있는 신분. 언제 또 둘이 이렇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올지, 아무도 모르는 불투명한 미래를 고대하며 허무하게 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애틋하다, 되게."
"뭐가. 내가? 우웨엑, 우리 창윤이 나 좋아해?"


그냥 아니라고 넘기면 될 것을, 왜인지 발끈했다. 분명 효진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데, 이유도 모르게 괜히 꼭 부정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나, 김효진 이 미...!"
"저하, 올바른 언행을 쓰셔야지요."
"올바른 언행? 좋아, 올바른 언행을 써서 말해 주지. 김효진은 아름다움을 친 자이니, 엄벌을 내려라!"
"허, 어이가 없어서. 이창윤 왜 뭐, 나 좋아하냐고 장난친 게 그렇게까지 분하냐?"


아니, 딱히... 아까와는 다른 느낌의 정적이 찾아왔다. 서로 머쓱해서 쳐다보지도 못하고, 누구 먼저 이 정적을 깨지도 못했다. 창윤은 괜히 앞에 놓인 자신의 책 모서리를 만지작거렸고, 효진은 헛기침을 하며 가만히 창윤이 만지작거리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하필이면 책 제목이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이라니. 효진이 보고 있는 걸 자각한 창윤은 황급히 손을 떼며 자신의 휴대폰을 보는 척했다.


"야... 좀 있으면 열두 시 된다."
"어? 아, 그래... 갈게, 이제."
"나가면서 밖에 기다리는 나인한테 그만 들어가셔도 된다고 해 줘. 불 끄고 나가, 잘 거야."
"에휴, 누가 왕자 아니라고."
"아, 진짜! 꺼져, 김효진."


창윤이 부스럭거리며 이불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던 효진은 다시 창윤 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목까지 이불 속에 파묻힌 채로 자신의 머리맡으로 온 효진을 빼꼼 쳐다보니, 효진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무, 뭐하는데...!"
"픕, 바보네. 인사하러 왔다, 잘 자라고. 캔들이나 켜 줄까?"
"아이씨, 진짜로... 저기 서랍에 성냥 있으니까 초만 켜 주고 딱 나가."
"지금이 어느 시댄데 성냥, 아! 또 때리려고, 아프지도 않은데."


마지막 장난을 마친 효진은 창윤의 서랍을 뒤적여 성냥을 찾아냈다. 탁탁, 성냥 긋는 소리가 울렸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효진과 수다를 나눈 탓에 나른했다. 끔벅끔벅, 눈이 감기려니 효진이 불을 껐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탁,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복도에서 효진이 나인에게 가도 된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드륵, 다시 문이 살짝 열리고 효진의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꿈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이창윤 저하, 편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 창윤아... 효진이가 너 이름 부르게 해 줬으니까 나 시험 잘 보게 해 줘야 돼... 양심 있냐구...? 괜찮아... 난 그런 거 안 가지고 태어났어......

ONF RPS @Mali_22_13

말리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댓글을 사용하지 않는 블로그입니다.

#15
[효셚] 나의 항아에게. 02
#17
[효셚] 나의 항아에게.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