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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션] 나의 항아에게. 06

효진/창윤 장편


나의 항아에게.

효진/창윤

W.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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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동궁전 정원을 거닐며 밤 산책을 나선 창윤의 곁에, 여느 때처럼 자연스럽게 효진이 따라 나섰다. 이젠 효진에게 하대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여전히 둘만 있을 때는 장난치기 바빴지만, 그래도 궐내에서는 누가 들을 수도 있으니 자제하기로 했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창윤은 매번 정해진 코스대로 정원의 반대쪽 끝까지 도착해서 대숲 사이에 자리한 큰 바위에 앉았다. 효진은 창윤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이 서성였다. 창윤은 평소처럼 자신의 곁에 앉지 않는 효진이 의아해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저하, 감히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무례한 질문입니다. 해도 되겠습니까."


효진은 창윤에게 도를 지나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전처럼 친구 사이에서든, 지금처럼 주종의 관계에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를 깍듯이 차렸지만, 친구를 사귀기 힘든 창윤에게는 좋은 친구로 오래 남고 싶다고 특히나 더 신경을 써 왔다. 게다가 무례함을 알고도 질문하려 함은 이미 마음을 먹었다는 터. 그렇기에 창윤은 설마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걸 알아챈 게 아닐까, 하고 섣불리 예측하기도 힘들었다. 태연하게 물어봐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찬 사람의 목소리는 떨리기 마련이었다.


"허, 허락하마. 무엇이 궁금한지... 말해 보거라..."


효진은 창윤이 상처받지 않길 바란다는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는 혹시, 저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겁니까. 단지 제 추측 하나로 여쭈는 것이니 불쾌하셨다면..."


효진은 말끝을 흐리더니 장전된 자신의 권총을 창윤에게 건넸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는 말 하나 꺼냈다고 죽을 각오까지 해야 될 정도로 극단적인 보수주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왕가가 머물고 있는 궐내라면 말이 달라졌다. 더군다나 효진의 경우에는 단순한 '말 하나'가 아닌, 자신이 모시는 왕세자의 눈앞에서 그의 명예를 모독한 셈이었으니 죽을 각오를 할 수밖에. 효진의 말이 창윤에게 사실이든 아니든 감히 입밖에 꺼내면 안 되는 말이었다. 안전장치까지 해제한 상태로 받은 권총은 검지에 힘을 까딱 잘못 주었다가는 효진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상태였다.


"너... 아무리 친구여도...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아느냐."


효진에게 하대를 해야만 하는 제가 싫었다. 세자라는 자리를 증오했다. 창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고, 눈가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창윤은 애써 아닌 척을 해 보며 총구를 효진에게 겨누었다. 손마저 부들부들 떨렸다. 사실 제가 왜 이 총을 쥐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효진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창윤의 손을 잡아서 총을 똑바로 쥐어 주었다. 제 손을 감싸는 온기는 처음 사격 연습을 하던 그날과 똑같았다.


"저랑 몇 번이나 연습하셨잖습니까. 두려워 마세요. 실전일 뿐이니."


언제나 그랬듯 한없이 다정한 효진에게 무너져 버린 창윤은 결국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예상했던 결과다. 목구멍 부분인지, 아니면 울대뼈 부근인지 모르겠지만 뭐에 꽉 눌린 듯 아파왔다. 창윤은 지금 입을 열면 떨렸던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일 것을 알았다. 그래도 어떡해.


"너, 틀렸어. 너를 마음에 두고 있냐고 물어볼 거면 나한테 물어야지, 왜 세자한테 묻고 난리야. 김효진을 마음에 둔 건 세자 저하 같은 역할이 아니라 나야, 이창윤. 감히 너를 바라보기엔 내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사람인 거 알아. 그래서 미안하고, 좋아해. 정말 많이 좋아해."


창윤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효진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마쳤다. 다행히 말하는 도중에 눈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았지만 곧 흐를 예정이라, 안간힘을 쓰며 눈에 힘을 주고 있는 창윤을 말없이 바라보던 효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하, 제가 무례한 짓 하나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그니까 저하가 아니라 이창윤,"


효진의 말을 정정해 주는 사이, 결국 가득 차 있던 눈물이 창윤을 이겼다. 또르르 흘러내리는 한 방울도 아니고, 주르륵- 소나기마냥 쏟아져 내렸다. 효진은 창윤이 앉아 있는 바위 앞에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창윤의 눈높이조다 조금 아래에서 미리 용서를 구했다.


"저 오늘 해고당할 수도 있겠네요. 주인한테 너무 제멋대로라서."


분명 효진에게 우느라 엉망이 되었을 얼굴을 보여 주기 싫어 두 손으로 가렸는데도 턱으로 모인 눈물들이 한 방울씩 톡톡, 창윤의 무릎으로 떨어졌다. 효진은 부드럽게 창윤의 손을 그의 얼굴에서 떼어낸 뒤,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눈물 자국들을 닦아 주었다. 그러고선 창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는데, 덕분에 창윤은 울 생각도 못하고 놀라느라 울음이 훌쩍거림으로 바뀌어, 다행히 효진의 어깨는 아주 조금씩만 젖어들었다.


"저하, 제가 고백드릴 게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들으실 수는 있으시겠어요?"


창윤은 그놈의 저하 소리 좀 그만하라고 화를 내려다가 그만두고 여전히 훌쩍이는 상태로 효진의 품 속에서 고개만 간신히 끄덕거렸다. 어차피 거절당할 미래, 조금이라도 더 안겨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좋아합니다, 저도."


창윤은 지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생각에 효진의 말을 곰곰히 되뇌어보았다. 금세 자신을 위로해 주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판단한 창윤은 효진의 어깨판에 얼굴을 파묻고는 웅얼거렸다.


"그런 말, 흡... 하지 마아... 그게, 흐으... 더 비참하다구..."


효진은 한숨을 내쉬면서 창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제가 볼 때는, 우리나라 차기 왕치고는 너무 둔하셔서 걱정이네요. 국제 정세 파악하려면 좀 더 예민하셔야 할 텐데."


창윤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서 효진의 어깨판에 파묻었던 얼굴을 빼내고 효진을 바라보았다가 금세 땅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치심, 두려움, 가장 밑자락에 있는 일말의 기대감이 복합된 마음에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효진은 그런 창윤을 보고 웃었다.


"창윤아, 너 좋아한다고. 세자께 드리는 고백이 아니고, 열일곱 김효진이 열일곱 이창윤한테 하는 뒤늦은 고백이니까 믿어도 돼. 믿어 줘."

ONF RPS @Autumn_22_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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